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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to/Korean Palace

눈이 다녀간 다음날, 창경궁 (2)

눈이 다녀간 다음날, 창경궁 (2)





통명전 뒤쪽 언덕에는 자경전이 있었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곳이었다. 동쪽으로는 남편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이 마주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며, 대비가 된 효의왕후 김씨에게 자경전을 넘겨주고 혜경궁 홍씨는 경춘전으로 옮겼다. 효의왕후는 자경전에서 외로이 살다 눈을 감았다.


원래는 ㅁ자 모양으로 화단도 있고 후원으로 통하는 문도 있게끔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정성껏 가꾸었는데, 일본놈들이 일본식 건물을 지었다. -.-











이 언덕에 자경전이 있었다.















바람이 어디에서 부는지 알 수 있는 깃발









일본놈들은 성종의 태실을 왜 밖에다 꺼내 전시했을까.

자기들이 뭔데. -.-










짜증나, 투덜대며 내려왔는데 춘당지 앞에 눈사람을 보고 웃었다.








얼음이 낀 춘당지.


원래 춘당지와 앞에 있던 내농포를 파서 하나의 큰 연못으로 만들었다 한다.

춘당지에 배를 띄워 뱃놀이할 수 있게 하고, 벚꽃을 마구 심어 일본식 공원을 만들었다.


격 없는 놈들이 우리 궁의 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온실 식물원도 세우고 동물원도 만들었다.

그래서 연세 있는 분들은 '창경원'이라고 한다.
















춘당지에 원앙이 많았다.

금슬의 상징이라지만 실제로는 난봉꾼이라던 그 원앙이구나.























문제의 온실.

후원 관람하면서 애련지 들어가기 전 오른편에 보이는 이 온실을 보며 기분이 참 좋지 않았다.








온실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많지 않은 종류의 꽃과 나무가 가득했다.

얘는 철쭉.













넌 내게 그저 추운 손을 녹이기 위한 거대 유리 핫팩일뿐.













아, 그런데 누군가 눈사람을 박살냈다.


애들이 그런 건가.

못됐다.

동심이 없어. ㅠㅠ


















영춘헌.

볕이 좋아 어르신들이 많이 앉아 계셔서 이리저리 찍기 힘들어 그냥 이 컷만.


집복헌과 영춘헌.

집복헌은 사도세자가 태어난 곳이고, 순조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순조의 어머니 수빈박씨가 머물렀는데, 정조가 집복헌에 자주 드나들며 집복헌 옆에 있는 영춘헌에서 책도 읽고 일도 하곤 했다.


그리고 1800년 6월,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동궐도'에 나타난 영춘헌은 임금의 거처로는 아주 작다.

이곳 역시 순조 30년에 불에 타 없어졌다 다시 지어졌지만, 모습과 위치는 '동궐도'와 다르다고 한다.

집무실에 장맛비가 새도 수리하지 않고 '그리 급하지도 않은데 괜찮다. 아껴야지.'했던 정조라서 작은 거처에 별 신경쓰지 않았던듯.









해가 정수리에 올라갈 무렵.









문정전을 보러 되짚어 가는 길.

































다닥다닥 붙은 전각이 옆 전각에 서로 드리우는 그림자가 아름답다.


















드디어 문정전.


영조의 첫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문정전에 위패를 모시고 '휘령전'으로 불렀는데,

경희궁에 머물던 영조가 자주 이곳에 와 대리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와 함께 정성왕후 서씨를 참배했다.


그리고 1762년 5월 13일, 영조가 휘령전에 왔는데 사도세자가 '아파서요...'하며 늦게 나타났고 그동안 쌓인 불신과 갈등이 폭발해 자결하라 했다. 신하들이 말리기도 했지만 결국 세자를 폐하고 뒤주에 가뒀고, 뙤약볕 아래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죽고 만다.









문정전 앞마당에서 칼로 자결하라 벼락같이 호령했을테고,

사도세자의 어린 아들 정조는 '아바마마를 살려주십시오!' 했을 것이다.


이때 실록을 보면 뒤주에 가두기 전 사도세자가 영조가 만나주기를 바라며 기다렸다는 기록이 며칠동안 계속 있고, 신하들이 보다못해 '아드님 좀 보시죠. 며칠째 저렇게 애타게 기다립니다.' 했더니 영조가 '그래? 난 몰랐는데?ㅋ' 이러더라. '와, 진짜 심하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실제로는 '선인문' 근처에서 죽었다.










희대의 비극 '사도세자의 죽음'의 원인은 뚜렷하지 않다.

노론월드였던 당시 정국에 맞서 소론을 지원했던 사도세자가 노론과 영조에 밉보여 당쟁으로 희생당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소론과 교류가 활발했던 것도 아니고 노론을 엎을 뭔가를 준비했던 정황도 잡히지 않고...


부지런하고 공부를 많이 하는 아버지 영조와 달리, 사도세자는 공부에 흥미가 없고 그리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었다고 한다. 

기질상 너무 맞지 않아 갈등을 빚는 과정에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이 깊어져 기행을 일삼아 도저히 '왕'으로서 일할 자질과 가능성이 없어 버리는데, 폐세자 명분이 있어야 하니 역모도 덧씌워야 했다는 설도 있다.


불행이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한 건, 아들 사도세자를 미친듯이 미워했으나 손자 정조는 정말 예뻐했다는 점.

'우리 손자는 똑똑하고 삼백년 종사를 이을 유일한 아이다. 우쭈쭈.'가 장난아니었다.

총명하고 단정한 손자라는 존재가 아들을 제거하는 일에 힘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사도세자 본인도 '아버지의 기대가 내 아들로 옮겨갔구나.' 감지하고 절망하여 더 망가졌을 수도 있겠다.

다르기는 하지만 둘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이 극단적인 갈등과 비극을 직접 보고 견딘 정조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록 속 사도세자, 한중록 속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가 아버지 신원을 복원하며 지은 행장 속 사도세자 모습이 각기 달라, 무엇이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깔끔하게 알기는 어렵다. 자료의 신빙성과 '승자의 기록'인 역사를 저울질하며 논쟁이 대단했다.


지금 일반 사람도 기질이 너무 다른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늘 고민인데,

절대 권력을 이어주고 떠나야 하는 왕에게 아들이라는 존재가 그럭저럭 맞지 않는 수준을 넘어, 죽이고싶을 정도로 엉망이라 인식한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풀릴 사안이었다.



영조가 뒤늦게 아들의 죽음을 후회하며 '금등지사'를 남겨 휘령전(문정전)) 요 밑에 넣고 솔기를 꿰맸고,

1793년, 정조가 즉위하고 17년이나 지나 채제공이 이 '금등문서' 카드를 꺼내들어 돌직구를 날렸다.

노론 벽파 김종수는 '임오년을 이야기하는 바로 그 자가 역적이다!' 맞받아치며 다퉜지만, 정조는 결국 채제공의 손을 들어주며 이 금등문서 구절을 읽어준다. 실존하는지 여부는 그때도, 지금도 불투명하지만 '금등문서'는 아버지를 거스르고 죽은 역적 사도세자가 조금은 움직이고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 사도세자 신원을 회복하고 국왕의 아버지로서 명예를 높이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창경궁은 화마도 여러 번 휩쓸고 갔고, 일제강점기 때 물리적 훼손뿐 아니라 정신도 훼손당하는 수난을 혹독하게 겪은 궁궐이다.

옛 자료를 잘 고증해 최대한 가깝게 복원을 했으면 좋겠다(온실 좀 없앴으면 좋겠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