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는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식량'이란 큰 말머리가 있지만, 사람이 먹을 거리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자연과 사람에 어떤 일을 행해왔는지, 정치·경제·사회 등 다양한 영역에서 먹을 거리를 톺아본다.
음식물 쓰레기나 비만 문제를 말할 때 '미국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살을 빼느라 난리인데, 아프리카에서는 못 먹어서 난리'란 비교를 흔히 한다. 굶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호단체를 통해 돕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뿌리를 갉아먹는 벌레는 찾지 못한 채, 시들시들해지는 꽃잎에 매달리는 건 아닌가, 회의가 들 때도 있다. 지구를 하나로 봤을 때 총량은 차고 넘치는데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불균형'이 발생하는지 의문이 든다.
이 책에서는 생산부터 불균형하며 불공정하기까지 한 구조를 잘 알려준다.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생산 수단부터 장악하니 그 다음 단계는 언제나 불공정하고 불균형할 수밖에 없는 아주 크고 어두운 진실을 마주 한다. 이미 시장에는 다국적 농업 회사의 종자로 키운 작물과 유전자 조작 작물로 만든 대기업의 가공 식품이 가득 차 있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필요없는 제품을 만들어 소비하도록 주입시키는 행태는 먹을 거리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하루 세 끼 챙겨 먹기 바쁜 우리가 이런 어두운 힘을 이겨낼 방법은 없을까. 다국적 농업 회사와 대기업의 제품 이외에는 생산도, 소비도 할 수 없는 구조로 완전히 굳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하나를 사더라도 어디서 어떻게 길러 어떻게 가공한 제품인지 따지고, 악질적인 행태를 보인 기업 제품은 사지 않고, 다국적 농업 회사와 대기업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로운 농가가 생산한 제품을 꾸준히 사야한다. 여기에 대한 정보가 많지는 않지만 조금씩 움직임이 느껴진다. 얼마 전 나는 꼽사리다 생협 편 방송분을 듣다보니 개별 농가를 찾기 힘드니 처음에는 생협으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이사이 성공 사례로 등장했다가 실패 사례로도 등장하는 우리나라에 혼란이 일기는 한다. 옮긴 이가 우리나라 현실을 덧붙였기에 이런 부분에서 다소 충돌이 있다. 겉으로 성공 사례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단기 실적을 위해 자극적이고 독한 전략을 써 장기적으로 뿌리를 말라죽게 만드는 실패 사례라 이해했다. '박정희 덕에 보릿고개를 넘겼다, 흰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란 어른들의 찬양 간증 뒤에는 우리나라 땅과 농업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쌀 수확 증대를 제 1의 정책과제로 삼아 '통일벼'를 개발했으나, 밥맛이 좋지 않고 냉해와 병충해에 약하며 지역 재배 여건에 맞지 않는다는 농민들의 불만을 무시, 일반 벼 모판을 뒤엎는 등 강제적인 방식으로 보급, 1976년 쌀 자급 목표를 이룬다. 하지만 관개수와 화학비료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결국 농약과 화학비료, 관개시설이 갖춰져야 했다. 전통적인 농업에서 유지되던 논밭 농사와 가축 사육 간의 물질순환 고리(가축에서 나오는 퇴비 사용, 그리고 농사에서 나오는 가축 먹이가 핵심이다)를 끊어놓아 농민들은 비료와 사료, 농약, 그리고 종자를 다국적기업으로부터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농가에서 구매해야 하는 외부투입물(자본)의 비율은 점점 늘어나는데도 농산물가격은 정책적으로 계속 낮은 상태에서 유지되고, 설상가상으로 자본생산성이 계속 떨어지다보니, 농가는 생산비와 가격 사이에서 압박을 받게 되어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 한국의 녹색 혁명 가운데
겉으로는 식량안보론을 펼치지만 식량안보를 핑계로 농민들에게 제 값은 주지 않고, 다국적 농업 회사들에게 판만 벌려 준 우리나라 정부의 행태를 보면, '이제 농업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경쟁력 떨어지는 1차 산업에서 손해를 보는 부분은 안타깝지만 대신 자동차와 서비스 산업의 흑자로 메우면 된다'는 주장이 얼마나 가혹하게 몰지각한 말인지 알 수 있다.
이번에 읽으면서 우리나라 농업에 초점을 맞춰 읽었는데 다음에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굶주림의 원인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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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에는 책임의 원칙이 있다. 민주적 구조란 자신들의 복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에 대해 할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구조이다.
식량과 토지의 부족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 때문에 굶주림이 생긴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삶과 죽음에 관한 경제적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농산물이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되는 꼬스따리까에서는 세 개의 초국적기업이 거대한 바나나농장을 장악하고 있다. (...) 미국 소비자들이 바나나에 지불하는 가격 중 14%만이 중앙아메리카지역에 임금, 그리고 정부가 부과하는 세금의 형태로 흘러 들어간다.
꾸바에서 식량위기를 극복하는 데 시장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은 구매력이 비교적 넓게 분포되어 있어서 노동과 생산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공평했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에서 시장과 정부 모두 굶주림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분명히 경제이론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민과 정책결정권자와의 관계에 달린 것이다. 자원에 대한 통제가 소수의 손에 있고 정치권력이 대체로 부유한 사람들의 큰 목소리에 반응하는 한, 시장도 정부도 굶주림을 종식시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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