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봉사정신을 높이 사요, 그러니 가격을 깎아주세요
우리집 여사님은 손재주가 좋으셔서 홈패션, 퀼트, 규방공예를 배웠고 주위 사람들에게 각종 소품이나 바지 등을 만들어 나눠 주시곤 한다.
어느 날 여사님 친구의 친구 가운데 한 분이 여사님이 만든 바지를 보고 마음에 들어했단다.
자신에게 장애를 가진 조카가 있는데 집 안에서 있는 시간이 많으니 그 때 입었으면 좋겠다고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부탁하면서 값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사정을 듣고 여사님은 얼른 만들어주겠다며 그 분에게 짧은 것, 긴 것 가격이 다르니 참고하시라 했다.
부탁한 것을 만들기 전에 샘플을 보여줬더니 그 날 그 분은 여사님에게 '**씨의 봉사정신을 높이 사요.'라며 살가운 문자를 보냈다.
나도 동대문에 같이 원단을 끊으러 갔다. 남자애니까 짙은 색이 낫겠지, 무늬는 너무 귀여운 건 좀 그럴 거야, 같이 머리를 맞대고 긴 고민 끝에 원단을 끊어 와 정성껏 만들었다.
바지를 만들어 보내줬더니 그 분은 원래 말한 가격의 절반을 보냈더란다.
자기는 곧 죽어도 그렇게 들었다고, 깎아주시면 안되냐고 했단다.
(귀가 참- 주관적이시네.)
사실은 자기가 옷을 사서 돈이 모자라서 그것밖에 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며칠 뒤, 자기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다며 중간에 있는 친구에게 나머지 돈을 전달해달라 부탁을 했단다. 자기가 먼저 전달한 것도 아닌데 일단 전달해달라고 했단다. 그걸 전해들은 여사님은 더 어이가 없어 나머지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그 분은 친구의 친구의 봉사정신을 살짝 칭찬하고 자극하여 절반 가격에 원하는 걸 가졌고 장애를 가진 조카에게 선물을 했다는 결론.
내 노동이 봉사로 강제 변환중...88%
우리 여사님은 고마운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지, 주문 제작이 아니면 돈을 받지 않는다.
붙박이장이 무너질 정도로 쌓아놓은 원단을 보거나, 혹사시킨 재봉틀이 열받아 나 좀 그만 부려먹으라고 쿵쿵쿵 무서운 소리를 내거나, 어느새 옷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실밥을 떼어낼 때면 우리집이 공장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웃기는 하지만.
봄에는 우리집에서 바지 등을 만들어 보내고, 가을에는 감 농사를 짓는 댁에서 1년 간 정성껏 기른 달디 단 감을 보내주신다. 어느 댁 딸이 결혼한다면 홑이불을 지어 보낸다. 그 댁에서는 고맙다며 식사 대접을 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따뜻하고 고마운 일이다. 서로 그 수고로움을 인정하고 있다.
사회복지 공부해서 대학 강의 다니고 SM5 몰고 다닌다는 그 분.
밖에서는 착한 얼굴과 살가운 말투로 다른 사람들의 봉사를 이끌어내겠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봉사도 강요했나보다.
여사님이 20년 가까이 자원봉사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가 값을 깎거나 거저 받을 좋은 핑계가 되었던 걸까.
'**씨의 봉사정신을 높이 사요.' 뒤에는 '그러니까 좀 깎아주거나 그냥 주면 좋겠는데'가 숨어있었나.
'아이 착하다' 머리 쓰다듬으며 '넌 이제 착한 어린이야' 착한 어린이 스티커 가슴에 붙여주며 손에 든 거 빼앗아가는 것 같잖아.
이 때 거절을 한다?
충분히 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사하게 돈을 밝히며 안 해준다는 원망을 한다. 순식간에 나는 봉사정신과 이타심이 결핍된 사람으로 둔갑한다. 누가 하지 않겠대요, 내 시간과 돈은 땅 파면 나오고, 당신 돈은 내 주머니에서 나오고 그런 거죠. 반면 칼같이 품삯 지급해줘야 할 것 같은 이에게는 부탁을 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줬으리라 짐작한다. 평소에 자원봉사활동을 하든말든 그게 노동의 가치를 폄하당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노동을 봉사로 멋대로 바꿔치기한 건 그 쪽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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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만드는 걸 우습게 아는 일이나, 자원활동, 사회공헌활동, 사회적기업이 비영리단체와 영리기업 양쪽으로 쪼일 때 등등 할 이야기가 많은데 글은 참말로 안 써지고, 몽당연필처럼 나눠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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