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아브르는 프랑스 북서쪽 항구 도시로 2차 대전 때 폭격을 당해 거의 도시 전체가 날아간 곳이다. 남부 마르세이유처럼 찬란한 햇살이 가득한 풍요로운 지역이기보다, 잔뜩 찌푸린 하늘을 늘 이고 사는 쌀쌀맞은 잿빛 항구. 수다스럽고 유쾌한 사람들보다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을 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
이 휑한 항구 도시에서 구두를 닦으며 살고 있는 마르셀은, 젊을 때는 보헤미안으로 살았으나 지금은 밥벌이와 아픈 아내 돌보기에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다 항구에서 까만 얼굴에 어리둥절한 눈빛을 가진 소년을 만난다.
'여기가 런던인가요?'
런던에 있는 엄마를 찾으러 가던 가운데, 안타깝게도 영국과 가까운 프랑스 항구에 불시착을 하고 말았다. 불법 이민이 큰 문제인 프랑스, 이 소년을 즉시 신고해야하지만 마르셀이 숨겨주며 일이 시작된다. 이 와중에 아내는 불치병에 걸려 입원을 하고, 시시각각 의심과 감시의 눈길이 마르셀의 일상을 점점 따끔따끔하게 한다.
처음에는 외상을 갚으라며 미간을 찌푸리던 이웃도 보였지만 불시착한 소년을 숨겨주며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슬쩍 따스한 손을 내민다. 피부색과 국적이 다르지만, 서민으로서 하루하루 짊어 진 무게는 마찬가지일테다. 손팻말을 들고 나서지 않아도 조용하지만 눈치 빠르게 움직여 함께 하는 모습이 너무 이상적이다싶지만 요즘 더욱 필요한 모습일터.
영화 내내 청록색과 황토색이 화면을 꾸민다. 무뚝뚝하고 우울한 청록, 저녁 밤하늘에게 빛을 다 내어주고 지친 노을같은 황토색이 바다와 땅만 덩그러니 있는 황량한 이 곳에도 놀랍게도 따뜻함이 스며있다. 이 영화는 무뚝뚝한 표정 아래 재치, 귀여움, 따뜻한 마음씀씀이를 숨겨 놓았다. 처음엔 무덤덤하지만 끝까지 보면 우울했던 청록색이 잿빛을 거둔 자리에 햇빛을 찰랑이는 바닷물색처럼 보인다. 르 아브르란 동네 사람들이 영화처럼 따뜻하리란 착각에 빠질만도 하다.
마르셀을 늘 주시하는 경감의 이름은 바로 '모네'. 르 아브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모네를 붙인 점도 귀엽다. 사진 속 긴 수염을 드리우고 모슬린 모자를 쓴 모네가 경감이라면 어떨까, 영화 속 모네 경감 역시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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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Ha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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