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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to/Korean Palace

눈이 다녀간 다음날, 창경궁 (1)



눈이 다녀간 다음날, 창경궁 (1)



'눈 언제 와? 온다고 했잖아......' 아련하게 눈을 기다리다 밤새 눈이 온걸 보고 기뻐서 카메라를 챙겨 창경궁으로 달려갔다.







ㅇㅏ......................... 눈형....................... 가지말아요...........................

처마에 눈물이 주룩주룩. ㅠㅠ

마음이 다급해 뛰어갔다.








창경궁은 궁 전체가 동향이다.

임금은 남향 집에서 일하는 것이 원칙이라 동향인 창경궁은 정궁이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원래 대비를 위한 처소로 지어진 궁이기는 하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머물 자경전, 아버지 사도세자 제사를 위한 경모궁(지금 서울대 의대 자리라고 함)을 지었다. 1789년 화성으로 이장하기 전까지 자주 경모궁 참배를 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건물이 헐리고 일본식 공원으로 바뀌고 창경원으로 격하되는 갖은 오욕을 겪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나서야 복원했다.



홍화문을 찍기 위해 맞은편으로 건너갔다.

홍화문은 창덕궁 돈화문에 비해 자그마하다. 

이 문 앞에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해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주었다. 앞서 윤 2월 화성행차 때 화성 신풍루 앞에서도 이렇게 쌀과 죽을 나눠줬다.


정조가 죽고 정약용은 이곳 홍화문 앞에 달려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명정전으로 들어가기 전 명정문 앞에서.

홍화문-명정문-명정전 곧은 선 하나로 놓여있다.


돈화문에서 선정문으로 한번, 선정문에서 인정문으로 한번 꺾어야 인정전이 나오는 창덕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다른 특이한 구조.







옥천과 옥천교.


명정문과 홍화문 주위에는 주자소도 있는데,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정약용에게 '주자소에 새로 벽을 발랐으니 나와서 책 만드는 일도 하고 경연에도 나오거라.'했던 그 주자소일듯. 


















옥천에 흐르는 물은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명정전 들어가기 전 홍화문 한 번 더.



















명정전 왼편에는 문정전 전각이 겹치고 겹쳐서 아름다운 선을 그린다.

또 집착해서 찍고......








명정전은 인종이 즉위한 곳이고, 정조는 장용영을 이 명정전 행각에 있게 했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당시 창덕궁에서 이곳으로 몸을 피했는데, 대원군이 황후가 별세했다하고 장례식을 준비했다고 한다.

죽었다는 건 훼이크...






















녹는 눈이 계속 신경쓰였다.








화마를 쫓기 위한 드므.

하지만 창경궁은 여러 번 불에 타 없어지고 다시 짓는 수난을 겪었다.




























명전전 뒤편에 비를 맞지 않고 다른 전각으로 갈 수 있게끔 처마가 있는 복도가 있다.









문정전이 보인다.

문정전은 조금 있다 보려고 한다.










저쪽은 창덕궁 쪽이다. 낙선재 일대는 창경궁 권역이었는데 지금은 창덕궁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함인정.

연산군이 지었던 인양전이 타버리고 인조가 인경궁의 함인정을 헐어 옮겨지었다고 한다.

남향에 너른 앞마당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적합한 장소였다고.


유생들도 만나고 경연도 많이 했다고 한다. 특히 영조와 정조가 자주 이용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환경전'

침전으로 쓰였는데 특이하게도 용마루가 보인다.


이 건물도 수난을 많이 겪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 창경궁을 점령하며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을 불태웠고, 인조는 광해군이 세운 인경궁을 철거해 환경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 순조 30년(1830) 8월에 불이 났는데 효명세자(익종) 시신을 모신 재궁이 있었는데 다행히 구했고 다시 지었다.


환경전 남쪽에 '공묵합'이 있었는데 세자궁으로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며 신하를 만났고, 정조도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책을 읽었다. 지금은 공묵합이 없다.







정조가 태어난 경춘전.

정조가 태어날 때 사도세자가 흑룡이 내려오는 꿈을 꿨고 경춘전 벽에 꿈속에 나온 흑룡을 그렸다고 하여 정조는 자신이 태어난 경춘전을 많이 아꼈다고 한다.


이후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도 태어났다.

환경전처럼 불에 탔다 다시 지어진 경춘전은 옛 그림 '동궐도' 모습과 다르다고 한다.

그림에서는 돌로 쌓은 축대 위 팔작집으 지어 나무계단으로 오르게 되어있는데 지금 경춘전은 그냥 낮은 축대 위에 올린 평범한 모습이라 아쉽다. '동궐도'대로 복원했으면 좋으련만.








임금의 편전인 양화당.

임진왜란 때 불탔다 광해군이 다시 지었는데 환경전, 경춘전과 마찬가지로 순조 30년에 불탔다 다시 지어졌다.



양화당 주위에 대비가 머무는 연경당,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치른 연희당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통명전.

왕비의 침전이라고 한다.









통명전도 사연이 많은데,

현종 5년(1664), 약방 도제조 허적이란 사람이, 도깨비가 많아서 거처를 옮기자 주장했다고 한다.

돌이 날아들거나, 옷에 불이 붙거나, 궁인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일을 두고 도깨비가 한 짓이라고 했던 모양.

'통명전이 너무 후져서 그런가보네.'하고 통명전과 양화당을 수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숙종 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이는 저주를 하기 위해 궁녀를 시켜 인형, 새, 쥐 등을 싸다 통명전 쪽에 파묻었다고 한다.

숙종 27년(1701) 10월, 이 저주 행각을 들키고 장희빈은 주것따고 한다.


장희빈의 저주는 참 무시무시한 일인데, 크게 놓고 보면 숙종빼고는 아무도 이기지 못하고 다 죽어버렸는데, 치열한 궁중 여인의 암투로 두고두고 소설, 드라마, 영화 소재로 우려지고 있다. 












햇빛과 세월빛이 많이 얹힌 단청 빛깔에 눈이 편하기는 하지만, 우여곡절이 깊은 창경궁을 생각하니 쓸쓸하다.













통명전 옆에는 연못을 파고, 돌난간을 두르고 돌다리를 놓았다.

샘물을 연못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성종이 구리로 만든 물통을 해놨더니 신하들이 '즈언하! 구리로 만든 물통이라니!' 사치스럽다 반발했고,

성종은 '어휴, 별... 참나 그래 돌로 바꾼다 바꿔! 내가 물통 구리로 좀 만들었다고 저런다!' 돌로 바꿨다.












눈이 무섭게 녹으며 땅에 내려오며 나도 눈물이 흐르고. ㅠㅠ

언덕으로 올라갔다.